2008년 03월 05일
폭력이라는 화두-문강형준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MBC 사이트에서 <PD수첩>을 봤다가 머리가 더 뜨거워져 버렸다. 이번 주에 '식물인간이 된 신입생'이라는 제목으로 다뤘던 내용인 즉, 용인대학교 동양무예학과에 유도로 합격한 신입생 강장호 군이 합격통보를 받은 이틑날부터 이틀간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에서 20여일 간 지내다가 결국 얼마전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PD 수첩>은 일단 학교측(학과)과 가해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당시에 구타가 있었지만 10대~20대 가량 엉덩이에 '빠따'를 맞았다고 식물인간이 될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뒤이어 담당의사에 의해 머리에 심각한 자극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강장호 군과 함께 '훈련'을 같이 받은 신입생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낙법과 굳히기 등의 반복훈련 과정에서 선배들의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숨겨진 사실이 밝혀진다. 선배들은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고, 동양무예학과의 교수는 "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접시물에 코박고 죽는다는 얘기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아무런 진상조사도 진행하지 않은 총장은 인터뷰를 거부하고, 용인경찰서는 구타와 뇌출혈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며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고 있었다. 이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 이러고 있을 동안, 피켓을 들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장에 찾아간 아버지는 학생 혹은 직원들로부터 물리적 저지를 당하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아 돌아오라'고 눈을 뜨지 않는 아들 곁에서 손을 놓지 못한다. 결국 강장호 군은 의식회복을 못하고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부모의 곁을 떠났다.
이 사건이 주는 충격은,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이 전혀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지금껏 우리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것을 너무나 오랫동안 보아왔던 것이다. 이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 즉 교수-선배-후배 간 권력관계, 결속력이 필요한 집단에서 자행되는 구타, 그것을 관행으로 여기는 감독자들, 사건을 축소하고 쉬쉬하려는 조직 등은 이제는 다시 말하기도 지루해질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다. 이 익숙한 구성요소들은 군대내 자살사건, (초/중/고/대)학교내 폭력사건, 가정내 폭력사건, 직장내 성폭력, 스포츠계와 연예계 내의 (성)폭력, 종교집단내의 부패, 병원 인턴들에 대한 폭력 등등을 통해 계속 그 모습을 드러낸다. 써놓고 보니 없는 곳이 없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의 인간들이 거쳐가는 거의 모든 경로, 즉 가정, 학교, 군대, 직장, 병원 등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가정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 모든 집단내 폭력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 폭력의 가해자들, 소위 선배들이 자신들이 예전에 겪었던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맞을 때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고 부당함에 몸서리를 쳤을텐데, 1-2년 지나면 그 고통을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있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맞는 순간은 잠깐이지만 그 순간을 지내고 나면 집단이 주는 그 신비로운 안정감 속에서 잘 지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체계적인 폭력의 되물림은 선후배의 틀이 확고하고, 고도로 결속된 집단들 내에서 발생한다. 군대, 스포츠계, 병원, 코미디계, 학교 등에서 유독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는 이유다. 이런 집단들은 집단 내에서 일단 배제될 경우 다시는 그 집단 속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폭력을 경험하는 개인들이 그 부당함을 절감한다고 해도 집단에서 아예 배제될 것을 각오하지 않는 한 문제를 삼기 힘들다. 그는 영원히 '고자질쟁이'가 되어 선배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고,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문제가 잘 해결된다는 보장 역시 극히 희박하다. 또 집단은 집단대로 내부고발자를 응징하고 그의 도덕성을 흠집냄으로써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되돌린다. 가정에서 맞고 자란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서 선배들에게 또 맞고, 대학에 가니까 MT가서 또 맞고, 군대에서 고참에게 맞고, 직장에 들어가서 상사에게 또 맞는다. 집단의 폭력은 이렇게 돌고 돌아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폭력의 굴레로 만들 수도 있다.

한국의 근대는 이 지점에서 모순을 안고 있다. 근대의 핵심은 '개인'이 가장 확실한 사회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다. 신, 가문, 신분, 핏줄 등이 개인의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기를 뛰어넘어 아무개라는 한 개인의 권리를 그 어떤 집단도 침해할 수 없고, 오직 그의 실력이 그의 출세를 결정할 수 있다는 원리가 근대를 규정한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거기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개인이 없이는 근대는 출현하지 못했다. 한국의 근대, 아마 비서구의 모든 근대,는 이런 식의 근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한국은 일제에 의해 근대화의 길을 강제로 걸었고, 해방 후 '조국근대화'를 필두로 엄청난 압축적 성장을 통해 오늘날의 경제적 성공을 이뤄냈지만, 그 속에서 근대의 핵심은 쏙 빠지고 근대의 외양만이 남았다. 21세기인 오늘에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집단이 없이는 개인적 성공을 이룰 수 없다. 학교를 졸업해야 하고, 대학을 가야하고, 군대를 가야하고, 돈을 벌려면 직장을 가야한다.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힘을 가진 '개인'이 존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집단의 역학를 거치지 않으면 개인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다. 명함이 없는 개인은 백수이거나 노숙자다. 아무리 능력있는 개인이라도 집단이 없이는 힘을 쓸 수 없다. '보따리장사'라고 자괴하는 시간강사와 연구실에 앉아있는 교수들의 하늘과 땅같은 격차는 집단 속에 있는 개인과 집단이 없는 개인의 격차다. 개인이 자유롭게 뭔가를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인터넷이나 유흥업소, 거리)에서는 근대를 넘어 포스트모던한 개인들이다가도 집단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집단의 구조 속에서 개인을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근대와 근대를 '짬뽕'해가며 사는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인간이라도 이 역학 속에서는 자기분열을 견뎌야만 한다. 소위 '철이 들었다'는 얘기는 그 자기분열을 스스로 억압하고 집단 속에서 숨죽이고 사는 개인이 되었다는 의미다. 사회의 절대다수는 바로 이런 개인들, 이런 '철 든' 개인들이다. 그렇지 않고는 한국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두 군데서 나온다. 먼저, 집단의 폭력적 구조를 견디고, 묵인하고, 혹은 그 구조를 체화해서 자기것으로 만들어 살아가는 개인들에게서 분출되는 엄청난 폭력들이 있다. 용인대 유도부에서 갖은 폭력을 견딘 학생이 선배가 되면 후배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랑스러운 용인대 유도부다!'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그것이 스포츠계로 들어가면 '용인대 계열' '비용인대 계열'로 갈려 또 치고박고 싸우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신체적 폭력과 학벌, 파벌과 같은 추상적 폭력이 한 개인의 몸 속에 다 들어가 있다. 이 긴장이 뿜어내는 폭력의 버라이어티 쇼를 우리는 매일 마주대하고 있다. 나는 이대나온 여자라고, 나는 남자라고, 나는 군인이라고, 나는 삼성맨이라고, 나는 검사라고, 나는 국회의원이라고 하는 이들이 타자들에게 선사하는 그 크고작은 폭력들.
다른 하나는, 그 분출되는 폭력들에 당하는 사람들이다. 강장호군의 경우처럼 생명을 빼앗기는 이가 있고, 집단에서 배제되어 국적을 바꾸는 사람도 있고(추성훈), 남자가 아니라, 서울대가 아니라, 대학을 못 나와서, 비정규직이어서, 고문관이어서 받은 폭력을 평생 가슴에 멍으로 남긴채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국민 범주 자체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있으니 아무도 그 존재를 보지 못하는 노숙자들과 같은 유령같은 사람들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이 두 범주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폭력의 집행자, 묵인자, 피해자들로 구성된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십 번씩 몸을 부딪히고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곳이 한국이라면, 여기에서 뭔가가 터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은 계속 가하고, 폭력을 묵인하는 사람은 그 어딘가에서 자신의 억압을 표출하고, 폭력을 당한 사람은 복수를 다짐할 것이다. (믿기지 않으면 한국영화를 아무거나 보면 된다. 거의 모든 한국영화들이 이런 맥락 속에서 내러티브를 전개한다. 이 사회적 폭력의 구조는 어쩔 수없이 영화 텍스트 속에 담기게 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그 강도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오늘날 강해지고 있다. 2009년 용인대 동양무예학과 신입생들은 또다시 낙법과 굳히기 '훈련'을 받을 것이고, 스트레스 받은 회사원은 오늘 단란주점에서 여자들을 사서 주무르며 마음껏 주인행세를 할 것이고, 사회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노숙자는 언제가 또 지하철에 신나를 뿌려댈 것이며, 이도 저도 아닌 대부분은 뭔가 불만과 열등감과 자만심에 푹 쌓여서 아슬아슬하게 살아 갈 것이다.
내게 더 큰 문제는, 날이 가면 갈수록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엔 뭐가 문제다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게 너무나 얽혀있어 그 매듭을 푸는 것 자체가 힘들어 보인다. 그 복마전의 사회 속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폭력을 참지 않으며, 폭력을 당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일상적 폭력들은 한국사회를 어떤 난장판으로 몰고 갈 것인가 (그렇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어떤, 거대한 폭풍이 닥치기 전의 불안한 고요같은 것이 있다.
# by | 2008/03/05 18:55 | 시사논단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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