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30일
<철학>스피노자의 '도덕'
by 고병권(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中)
스피노자 하면 우리는 보통 '사과나무'를 떠올린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지금은 이 사과나무 이야기의 주인공이 루터라는 걸 알지만, 워낙 오랫동안 잘못 알아온 터라, 나조차 스피노자와 사과나무의 연상을 지우는 것이 쉽지 않다.
과일나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스피노자의 운리학을 아주 잘 드러내는 과일이 하나 있다. 바로 태초에 신께서 아담에게 따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다. 선악과는 스피노자만이 아니라 '악'의 문제를 고민했던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하나의 화두였다. 도대체 신은 그런 악한 과일을 왜 만들었을까. 모든 걸 아는 신은 결국 아담이 그걸 따먹게 될 것도 알았을 텐데, 어길 게 분명한 명령을 왜 내렸을까.
스피노자가 살던 17세기 철학자들은 악에 대해 대체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악이란 아무것도 아니다."악이 존재한다면 신이 그것을 창조했다는 말인데,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들은 악을 존재가 아닌 결핍으로 보자고 말한다. 즉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선이라 부르는 어떤 자질들이 결여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놀랍게도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악'만이 아니라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선과 악은 상관적인 것이므로 악이 없다면 선도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선악이 사물이나 관념을 인간 자신의 생각과 이익에 맞추어 판단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연 전체로 보면 선악이 존재할 수 없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었다고 해서 늑대가 악하거나 양이 선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늑대가 악하고 양이 선한 것은 오직 양치기 눈에만 그런 것이다.
선악 관념은 인간이 양치기와 같은 시각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생겨난다. "눈은 보기 위해 있고, 이는 씹기 위해 있으며, 식물과 동물은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 태양은 비추기 위해서, 바다는 물고기를 기르기 위해서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따라 판단하는 습관이 있다. 아에 세계 자체를 누군가 자신을 위해 창조한 것으로 간주할 정도다.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과 선악 관념을 유치함의 징표로 받아들였다. 인간이 "능력 있고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어떤 선악 관념도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악 관념이 생긴 것은 "이 가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태초에 선악과가 있었을까. 스피노자는 '선악과'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연들을 아담의 무지와 무능 탓으로 돌리고 있다. 아담에 대한 스피노자의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견해와 정반대다.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아담은 죄를 짓긴 했지만 그래도 신이 직접 창조한 가장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아담은 인간의 역사에서 갓 태어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 불과하다. 그런 아담에게 신은 친구처럼 다가와 어떤 과일을 먹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명령이었을까. "만약 신이 그 과일을 먹지 못하도록 정했다면 아담이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아담이 받은 처벌은 중요치 않다. 처벌 여부에 상관없이 명령을 어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의 절대성은 훼손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말이, 처벌받기는 하지만 어길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 것은 아담의 유치한 상상에 의해서다. 부모 말을 어긴 아이처럼, 아담은 신의 말을 어기고는 벌을 받을까 무서워 숨어버렸다. 그리고 신이 자신을 찾는다고 상상했다. 신은 모든 것을 알지만, 아담이 그렇게 상상하므로, "아담아 어디 있느냐"하고 찾아다닌다. 마치 신은 어디든 존재하는데도, 하늘에 산다는 모세의 상상 때문에 높은 산 위에서 목소리를 내었듯이 말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악한 과일이 있을 리 없다. 스피노자는 아담의 선악과를 우리가 흔히 보는 '독'같은 것이라 했다. '독'은 결코 악한 게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관계 속에서 우리와 맞지 않기에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한의사들이 자주 말하듯이, 다른 어떤 것과 함께 먹거나 우리 체질이 변화하면 그것은 약이 될 수도 있다.
신의 말 중 위반된 것은 하나도 없다. "신의 계시는 그 과일을 먹었을 때 아담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날 치명적 변화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자신이 신의 명령을 어겼고 그 때문에 심판을 받아 몸에 변화가 생겼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제 몸에 맞지 않은 과일을 먹었고 결국 신의 계시대로 몸의 부분적 해체를 경험한 것이다. 신의 말은 그대로 관철되었다. 위반도 없고 별도의 처벌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지혜로운 자에게는 지혜 자체가 복이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음 자체가 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선과 악이라는 말 자체는 보존하자고 했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다르지만 그 말들로 뭔가 중요한 구분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신이 아담에게 말해준 것이지만 아담이 오해했던 것이기도 하다. 선(Good)과 악(Evil)은 존재하지 않지만, 매번 우리에게는 '좋음'(Good)과 '나쁨'(Bad)을 구별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도덕(moral)과는 다른 윤리(ethic)의 문제이다. 지금 내게 맞는 과일은 어떤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인가.지금의 나는 어떤 글, 어떤 음악,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게 좋은가. 우리에게 좋은 사회, 좋은 정치란 어떤 것인가.
물론 미리 정해진 것은 없다. 좋고 나쁨은 매번 관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좋은 것을 만나고 나쁜 것은 피할 것이다. 그러나 마냥 운에 맡길 수만은 없다. 우리가 독을 약으로 바꾸는 유능한 약제사라면, 운에 기대거나 '나쁜' 것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쁜'것들은 관계의 변화를 통해 언제든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윤리학'은 그런 삶의 기술과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좋은 만남을 조직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능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악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지탄이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그것을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약제사의 실천적인 지혜인 것이다.
스피노자 하면 우리는 보통 '사과나무'를 떠올린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지금은 이 사과나무 이야기의 주인공이 루터라는 걸 알지만, 워낙 오랫동안 잘못 알아온 터라, 나조차 스피노자와 사과나무의 연상을 지우는 것이 쉽지 않다.
과일나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스피노자의 운리학을 아주 잘 드러내는 과일이 하나 있다. 바로 태초에 신께서 아담에게 따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다. 선악과는 스피노자만이 아니라 '악'의 문제를 고민했던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하나의 화두였다. 도대체 신은 그런 악한 과일을 왜 만들었을까. 모든 걸 아는 신은 결국 아담이 그걸 따먹게 될 것도 알았을 텐데, 어길 게 분명한 명령을 왜 내렸을까.
스피노자가 살던 17세기 철학자들은 악에 대해 대체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악이란 아무것도 아니다."악이 존재한다면 신이 그것을 창조했다는 말인데,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들은 악을 존재가 아닌 결핍으로 보자고 말한다. 즉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선이라 부르는 어떤 자질들이 결여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놀랍게도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악'만이 아니라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선과 악은 상관적인 것이므로 악이 없다면 선도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선악이 사물이나 관념을 인간 자신의 생각과 이익에 맞추어 판단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연 전체로 보면 선악이 존재할 수 없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었다고 해서 늑대가 악하거나 양이 선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늑대가 악하고 양이 선한 것은 오직 양치기 눈에만 그런 것이다.
선악 관념은 인간이 양치기와 같은 시각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생겨난다. "눈은 보기 위해 있고, 이는 씹기 위해 있으며, 식물과 동물은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 태양은 비추기 위해서, 바다는 물고기를 기르기 위해서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따라 판단하는 습관이 있다. 아에 세계 자체를 누군가 자신을 위해 창조한 것으로 간주할 정도다.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과 선악 관념을 유치함의 징표로 받아들였다. 인간이 "능력 있고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어떤 선악 관념도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악 관념이 생긴 것은 "이 가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태초에 선악과가 있었을까. 스피노자는 '선악과'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연들을 아담의 무지와 무능 탓으로 돌리고 있다. 아담에 대한 스피노자의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견해와 정반대다.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아담은 죄를 짓긴 했지만 그래도 신이 직접 창조한 가장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아담은 인간의 역사에서 갓 태어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 불과하다. 그런 아담에게 신은 친구처럼 다가와 어떤 과일을 먹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명령이었을까. "만약 신이 그 과일을 먹지 못하도록 정했다면 아담이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아담이 받은 처벌은 중요치 않다. 처벌 여부에 상관없이 명령을 어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의 절대성은 훼손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말이, 처벌받기는 하지만 어길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 것은 아담의 유치한 상상에 의해서다. 부모 말을 어긴 아이처럼, 아담은 신의 말을 어기고는 벌을 받을까 무서워 숨어버렸다. 그리고 신이 자신을 찾는다고 상상했다. 신은 모든 것을 알지만, 아담이 그렇게 상상하므로, "아담아 어디 있느냐"하고 찾아다닌다. 마치 신은 어디든 존재하는데도, 하늘에 산다는 모세의 상상 때문에 높은 산 위에서 목소리를 내었듯이 말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큼 신을 만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악한 과일이 있을 리 없다. 스피노자는 아담의 선악과를 우리가 흔히 보는 '독'같은 것이라 했다. '독'은 결코 악한 게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관계 속에서 우리와 맞지 않기에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한의사들이 자주 말하듯이, 다른 어떤 것과 함께 먹거나 우리 체질이 변화하면 그것은 약이 될 수도 있다.
신의 말 중 위반된 것은 하나도 없다. "신의 계시는 그 과일을 먹었을 때 아담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날 치명적 변화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자신이 신의 명령을 어겼고 그 때문에 심판을 받아 몸에 변화가 생겼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제 몸에 맞지 않은 과일을 먹었고 결국 신의 계시대로 몸의 부분적 해체를 경험한 것이다. 신의 말은 그대로 관철되었다. 위반도 없고 별도의 처벌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지혜로운 자에게는 지혜 자체가 복이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음 자체가 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선과 악이라는 말 자체는 보존하자고 했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다르지만 그 말들로 뭔가 중요한 구분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신이 아담에게 말해준 것이지만 아담이 오해했던 것이기도 하다. 선(Good)과 악(Evil)은 존재하지 않지만, 매번 우리에게는 '좋음'(Good)과 '나쁨'(Bad)을 구별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도덕(moral)과는 다른 윤리(ethic)의 문제이다. 지금 내게 맞는 과일은 어떤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인가.지금의 나는 어떤 글, 어떤 음악,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게 좋은가. 우리에게 좋은 사회, 좋은 정치란 어떤 것인가.
물론 미리 정해진 것은 없다. 좋고 나쁨은 매번 관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좋은 것을 만나고 나쁜 것은 피할 것이다. 그러나 마냥 운에 맡길 수만은 없다. 우리가 독을 약으로 바꾸는 유능한 약제사라면, 운에 기대거나 '나쁜' 것으로부터 도망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쁜'것들은 관계의 변화를 통해 언제든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윤리학'은 그런 삶의 기술과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좋은 만남을 조직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능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악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지탄이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그것을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약제사의 실천적인 지혜인 것이다.
# by | 2008/03/30 11:39 | 천개의 고원, 천개의 생각 | 트랙백 | 덧글(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