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13일
상징정치론

법의 상징성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아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법은 일종의 상징인 것이다. 법은 때로 단속해야 할 대상을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미국의 독점금지법은 독점을 금지하는 법이 아니라 미국의 재벌들에 대한 비난을 도덕적이고 의식적인 것으로 돌려 버리는 효과만을 낳고 있다는 주장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법이라든가 정부의 정책은 사회 환경을 실제로 바꾸든 바꾸지 않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환경에 대한 심리적 적응의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미국의 정치학자 머레이 에델만이 주장하는 '상징정치론'의 핵심이다. 에델만의 정의에 따르면, '정책'은 "정치적 이해관계의 스펙트럼에 대한 일단의 이동적이고, 다양하고, 모순적인 반응"일 뿐이다. 특히 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여론'도 주로 권력을 통제하기보다는 권력에 대한 잠재적 반대를 잠재우는 용도로 사용되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공공 논쟁'도 마찬가지의 용도로 사용된다.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은 그 논쟁의 결론이 원래 자신의 뜻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수용한다. 반면 아예 그 논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뜻에 반하는 결과의 수용도가 훨씬 낮다. 그런 점에서 공공 논쟁이나 갈등은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정통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법과 정책을 만드는 정치는 어떠한가? 에델만은 '정치=상징'의 등식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인 민주주의 개념에 집착하고 있는 현대 정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델만에 따르면 현대 정치는 이미지 정치다. 이미지 정치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지각 능력의 한계, 대중매체를 통한 국민의 정치 이해, 실체보다는 외관을 강조하는 대중매체의 속성이라는 세 가지 명제에 근거하고 있다.
에델만은 라스웰의 전통적인 정치학 모델로는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현대의 이미지 정치를 전혀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정치학자들이 여전히 상징,기호,이미지 조작을 무시한 채 정치행위의 '하드웨어'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헤롤드 라스웰도 에델만의 책에 대한 서평을 통해 에델만의 주장이 '정치학의 지도를 변화시킨'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행태주의와 실증주의에 함몰된 미국의 다수 정치학자들은 계량화할 수 없고 따라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의 '상징'으로의 전락을 애써 외면해 왔다.
'상징정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늘 현명한가? 인간은 늘 합리적인가? 합리적 세계의 모델은 인간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고르는 일에 있어서 모든 적절한 정보를 취한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가?
미국의 사회과학자들은 개인의 정치적 요구나 태도가 비교적 고정되어 있는 걸로 간주하여 이를 명확하고, 지속적이며, 조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하드 데이터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나 태도가 안정되어 있으며 일관성이 있다고 믿는 건 옳지 않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신념과 의견에 일관성이 없으며, 이는 상당 기간 누적된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게다가 일반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의외로 낮다. 특히 민주주의가 꽤 발달했다는 미국의 경우는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식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요컨대 정치적 인지는 외부의 상징 조작에 따라 늘 변할 수 있는 취약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이 한국 정치인들이 흔히 상습적으로 내뱉기 좋아하는 '우리 국민의 위대한 민주적 역량'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겠다. 실제로 '상징 조작'아니 '여론 조작'이니 하는 단어를 말하면 혼자 잘난 척하고 국민을 깔본다는 말을 듣기 십상인 반면, 국민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건 겸손하고 긍정적이라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그것이 한국의 현실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 떠들기 위한 말을 할 것이 아니라, 각자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을 해 보면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에델만의 박사 학위 논문은 미국의 방송규제 기관인 연방통신위원회(FCC)를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물론 그의 결론은 그의 저서 [정치의 상징적 이용]에서 밝힌 그대로 FCC가 실질적인 규제는 전혀 못하면서 단지 규제를 하는 척하는 '상징'으로 기능할 뿐이라는 것이다.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On Revolution]에서 "그 어떤 분야보다도 정치에서는 존재(being)와 외양(appaarance)을 구별할 길이 없다. 인간사의 영역에 있어서 존재와 외양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에델만은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관심은 어떤 입장이 현실 또는 현실적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 현실(multiple realities)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에델만이 정치언어에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근본적으로 상징적이며 언어적 행위이다. 그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지, 고립된 개인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징적 상호 작용론'을 원용하여 정치 분석에 적용시킨다. 요컨대 개인의 정치적 의식과 행동을 형성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언어가 불만과 만족의 원인에 관해 불러일으키는 신념이라는 것이다.
그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생각해 보자. 정치적 사건과 발전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들이 정치적 사건과 발전을 경험하는 건 매스미디어 또는 대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언어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그 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순수하지도 않다. 언어는 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현실의 창조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언어는 정치현실이며, 의미에 대한 갈등이 없다면 그건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에델만은, 정치언어는 "뭉축한 것을 날카롭게 하고 아주 날카로운 것을 다소 뭉툭하게 한다"는 케네스 버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치언어가 정치적 지지 또는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 조작되는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정치언어에서 발생하는 '가치 체계의 전도'에 주목했다.
예컨대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사형은 폭력을 규제하기 위한 수단이고, 가난한 사람과 젊은이들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건 그들을 돕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걸 거부하는 건 그들의 자립과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 된다. 물론, 늘, 꼭 그러하든 건 아닐 게다. 그렇지만 매스미디어에서 1년 365일 내내 쏟아져 나오는 언어엔 그런 '가치 체계의 전도'현상이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에델만은 정치언어에 흘러넘치는 왜곡과 모순은 언어 그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언어의 속성에 집착하는 어의론자들과 구별된다. 에델만이 보기에, 정치언어의 왜곡과 모순은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서의 불평등과 긴장에서 비롯된다. 기득권층은 기득권을 정당화하려고 애를 쓰며, 박탈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상태를 정당화해 심적 평안을 얻고자 한다. 그런 필요가 보다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상징으로 전락했다는 건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히 과격한 주장임에 틀림없다. 그건 지배계금의 헤게모니가 정치라는 의식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거는 그러한 의식의 주기적 '클라이맥스'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사회 개혁의 구호들이 선거철에 난무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그 구호들은 까맣게 잊혀지고 예전의 사회질서는 다시금 반복된다. 투표는 참여의 의식적 표현으로서 개인적인 희망과 불안을 발산하는 동시에 공공 정채과 볍규에 순응할 의무의 확인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이다.
'상징정치론'의 시각에선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들은 모두 다 의심되고 해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립조건이라 할 선거가 단지 상징적 의식에 불과하다면, 무엇인들 온전하겠는가.
...유권자들은 후보의 정책보다는 이미지에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또 후보들은 이미지 메이킹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런 이미지 싸움에서 무언가 알맹이로 승부를 걸겠다는 정치인은 대중의 수준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선전은 선전 대상자들 중에서 가장 이해력이 낮은 자들로 그 지적 수준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그 지적 수준은 설득 대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낮아지게 된다"고 말했는데, 이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진실에 가깝다. 이미지정치론의 교훈은 간단하다. 대중의 수준을 과대평가하는 정치인은 결코 집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델만은 권위주의 정부의 상습적인 통제술 가운데 가장 유효한 것이 국민의 정치화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정치화'는 '마음 상태의 창조'를 의미한다. 지배권력은 '정치화'를 통해 개인의 자율성을 침범한다. 그렇지만 '정치화'는 민주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효과가 크다. 에델만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바로 지배 권력에 자신을 내맡기고 자신의 자율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잘 보여 준 책이라고 말한다.
'정치화'는 궁극적으로 국민이 지배적 가치를 수용케 만드는 수단이지만, 지배 권력에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민이 정치적인 것을 비정치적인 이슈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에델만은 테크닉에 관한 담화가 가치에 관한 담화를 대체하고 있다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견해에 동의를 표하면서, 대중의 지지와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 정치적인 문제를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로 돌리는 걸 가리켜 '반정치(antipolitics)'라고 말한다.
에델만은 "식민 치하 아프리카인들의 유럽 지배자들에 대한 공개적 저항은 더욱 자율적인 퍼스낼리티를 가져오게 만들었다"는 프란츠 파농의 결론을 인용하며, 자율성의 정치적 차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매스미디어 시대에 대중의 자율성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 매스미디어가 끊임없이 '정치적 스펙타클'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는 사회적 문제, 위기, 적,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구성하고 재구성한다. 그렇게 해서 대중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가하고, 또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는 재확약(reassurance)을 반복한다.
에델만은 그 과정에서 정치학자 앤소니 다운스가 말하는 이른바 '이슈에 대한 관심의 사이클(issue-attention cycles)'은 조작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어떤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이슈가 나타나 그것을 밀어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적 이슈란 사회의 권력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부상되는 것에 불과하다...
-강준만, 나의 정치학 사전-
# by | 2008/04/13 11:46 | 천개의 고원, 천개의 생각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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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는 오래전부터 역사를 기록하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수십, 아니 수백 수천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역사 자료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중에는 사실과 거짓이 들어있다.
역사에는 기본원칙이 4가지정도 있다.
1.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며,
2. 역사는 역사가의 양심에 달렸으며,
3. 역사는 주관적인 생각이자 입장, 느낌이고,
4. 역사는 정확한 역사 기록이 아닌, 소문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역사가 또한 3종류로 분류된다.
1. 거짓말하는 사람
2. 잘못 알고 있는 사람
3. 알지 못하는 사람
우리 역사에는 수 없이 많은 날조, 과장, 왜곡이 되어있다.
국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세계사 지식조차 거짓으로 꽉 차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국사 왜곡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정보화 시대이므로 세상을 넓게 바라보아야 한다.
포털 사이트 중에는 왜곡된 국사를 밝히는 카페는 수 없이 많다.
물론 그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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